하나씩 뽑아 먹으려고, 감을 걸어두는 계절

밤에는 서리가 내리지만, 낮은 아직 가을
상강 무렵이면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 한낮에는 쾌청한 가을 하늘이 이어져요. 산에는 단풍이 절정을 향하고, 마당가에는 국화가 활짝 피고요. 그 사이 처마 밑에는 껍질을 벗긴 감들이 줄줄이 걸려 있어요. 한 줄에 여럿씩 꿰여, 바람이 지나가면 한꺼번에 살랑 흔들리고, 해가 비스듬히 들면 감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요.
상강은 첫서리가 내린다는 절기예요. 서리가 내리면 곡식도 더는 여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전에 거두고 겨울 채비를 해야 했어요. 감을 깎아 걸어두는 것도 그 겨울 채비의 하나였고요.

곶감의 ‘곶’에는 꽂는다는 뜻이 남아 있어요
깎은 감은 꼬챙이에 꿰어 말려요. 곶감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고요.
'곶'은 '꽂다'의 옛 말 형태라서, 곶감은 말 그대로 꽂아서 말린 감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감을 깎을 때도 꼭지는 남겨두어요. 걸어두려면 붙들 데가 있어야 하니까요. 대나무나 싸리나무 꼬챙이에 꿰기도 했고, 감 꼭지에 노끈을 감아 굴비 엮듯 한 줄로 매달기도 했대요.

걸어두는 동안, 감은 천천히 달아져요
떫던 감도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천천히 달아져요. 겉은 쪼글쪼글해지고, 빛깔은 주황에서 짙은 갈색으로 깊어지고요.
곶감이 되려면 깎아서 걸어둔 뒤로도 한 달 남짓, 길게는 한 달 반 가까이 기다려야 해요. 그사이에는 감을 살피고 뒤집어주는 손길이 필요하고요. 비가 잦거나 날이 푹하면 걸어둔 감이 떨어지거나 곰팡이가 슬기도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해요.
이 시간은 서두른다고 줄지 않아요. 일교차가 큰 날과 바람 잘 드는 날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니까요.

겨울이 오면, 하나씩 뽑아 먹었어요
'곶감 뽑아 먹듯 한다'는 속담이 있어요. 애써 모아둔 것을 조금씩 헐어 쓰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곶감이 그만큼 아껴 먹는 음식이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꼬챙이에 꿴 곶감을 하나씩 빼 먹던 모습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짐작해보게 돼요.
걸어둘 때는 아직 떫은 감이었는데, 꺼낼 때는 어느새 달게 마른 곶감이 되어 있어요. 시간이 지나야 더 달게 맛볼 수 있는 몫을 미리 챙겨둔 셈이에요.

들판은 조용히 비어가고, 처마 밑은 채워져요
가을걷이가 마무리되면 들도 하나둘 비어가요. 고구마와 땅콩을 캐고, 감과 밤을 거두면서요. 산에서는 초목이 누렇게 지고, 옛사람들은 이 무렵 벌레들도 겨울잠을 자러 땅속으로 들어간다고 보았어요.
한 해가 천천히 문을 닫아가는 풍경이에요. 처마 밑을 채운 감은 그 풍경 속에서 겨울을 향해 마르고 있었고요.

올해, 하나쯤 걸어두고 싶은 장면
상강은 한 해의 끝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도 해요. 올해도 두 달 남짓 남았고요.
지나온 시간 가운데 나중에 하나씩 꺼내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잊히기 전에 간직해두면 좋겠어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진 한 장, 메모 한 줄, 서랍 속 전시 티켓 한 장이어도요. 오늘 저녁 식탁에서 오간 말 한마디도,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흐려지잖아요.
겨울 어느 날 곶감 하나 뽑아 먹듯 꺼내보면, 그때쯤엔 달게 마른 기억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올해 당신이 걸어두고 싶은 장면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