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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위한 연감, 시절도감 | Ep.1 추석편
Brand Expeience팀
Hazel · 2026.09.23 · 조회 10


이맘때면 먼저 짙어지는 것들
딱히 소나무를 찾아 나선 것도 아닌데, 공원 옆을 지나다 훅 끼쳐오는 냄새에 걸음이 멈출 때가 있어요. 유독 그 냄새가 코끝에 걸리는 계절이 있는데, 추석을 앞둔 요즘이 그래요.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어요. 여름내 밝고 선명하던 잎이 어느새 짙고 진득한 초록으로 가라앉아 있거든요.
그맘때가 되면 누군가는 빈 봉지 하나를 들고 뒷산에 올라요. 어떤 집에서는 아이들 손에 심부름처럼 봉지를 들려 보내기도 했고요. 처음엔 놀러 가는 줄 알고 신나게 올라가지만, 막상 쓸 만한 잎을 골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요.

송편은 빚기 전부터 시작돼요
너무 여린 잎도, 지나치게 억센 잎도 피하고, 짙어진 초록빛에 아직 윤기와 탄력이 남아 있는 잎을 골라내요. 눈으로 먼저 가늠하고 손으로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이 일의 요령이에요. 나뭇가지 아래로 몸을 숙이고 잎을 한 움큼씩 훑을 때마다 손끝에는 옅게 송진 냄새가 배고, 옷깃이며 손등에도 그 냄새가 하루쯤 머물러요. 발밑에는 먼저 떨어진 잎들이 켜켜이 쌓여 밟을 때마다 마른 소리를 내고요.
마당에 돌아와 부려놓은 솔잎 더미 앞에 쭈그려 앉아 마른 가지와 상한 잎을 하나씩 골라내는 손. 그게 사실 송편의 가장 첫 손이에요. 아직 쌀 한 톨 손대지 않았는데도, 색과 냄새로 이미 이 떡을 위한 일은 시작된 셈이죠.

향보다 먼저, 솔잎에는 쓰임이 있었어요
그렇게 고른 잎은 빚은 송편과 함께 찜기에 들어가요. 바닥에 한 번, 송편 사이에 한 번. 켜마다 솔잎을 깔아두면 뜨거운 김 속에서도 떡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고 사이사이에 작은 틈이 생겨요. 찜기 안을 들여다보면 하얗게 빚은 반달들 사이로 짙은 초록 잎이 줄줄이 놓여 있어요. 쓰임을 위해 깔아둔 것이지만, 그 자체로 꽤 선명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요.
솔잎에는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을 더디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질도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 명절 떡은 그날 하루 먹고 끝나
는 음식이 아니었어요. 며칠 두고 가족과 이웃이 나누어 먹기도 하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 손에 들려 보내기도 했으니까요. 붙지 않게 하고, 조금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게 하고. 송편 사이에 한 켜씩 깔린 솔잎에는 향보다 먼저 생활의 쓰임이 있었던 셈이에요.

뚜껑 열기 전, 먼저 익어가는 냄새
불 위에 찜기를 올리고 나면 한동안은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아요. 그 기다림 동안 부엌 안은 이미 솔잎 냄새로 가득 차서, 다른 방에 있던 사람도 코를 킁킁대며 다 됐냐고 묻기 시작해요.
뚜껑을 여는 순간 확 퍼지는 솔향은, 찌기 전 마당에서 맡던 것보다 한층 더 진하고 둥글어요. 날잎일 때의 알싸함은 가시고, 뜨거운 김을 통과하며 훨씬 부드럽고 은은한 냄새가 되어 있거든요. 색으로 먼저 골라낸 잎이, 마지막에는 그렇게 냄새로 제 몫을 다해요.

요즘엔 조금 옅어졌어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 집도, 직접 솔잎을 골라 찜기에 켜켜이 까는 집도 예전만큼 흔하지 않죠. 떡집이나 마트에서 송편을 사 오기도 하고, 선물로 받은 것을 그대로 상에 올리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요즘 송편을 먹을 때는 솔향이 먼저 닿는 일이 드물어졌어요. 봉지를 열었을 때의 냄새와, 방금 나무에서 훑어온 솔잎의 냄새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으니까요.
산에서 색과 향으로 잎을 골라내던 손, 그 잎을 송편 사이에 겹겹이 끼워 넣던 손. 그 두 손을 거치지 않고도 이 계절을 만나고 싶다면, 어쩌면 송편이 담긴 접시보다 근처 공원으로 가는 편이 더 가까울지도 몰라요.
명절의 냄새라는 건 그렇게 남는지도 모르겠어요. 한때는 손끝에 배고 부엌 안을 가득 채우던 냄새가, 이제는 공원 가장자리나 길가의 소나무를 지날 때 불쑥 돌아오는 것처럼요. 명절을 기억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는 건가 봐요.

그래도 추석의 냄새는 그렇게 남아요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추석날 송편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의 냄새를 한 번 떠올려보세요.
하얀 반달 사이사이에 짙은 솔잎을 켜켜이 깔던 풍경과, 뜨거운 김 속에서 둥글게 퍼졌을 향까지. 올해 첫 솔내음은 이미 길가에서 먼저 만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송편 한 입에서 뒤늦게 알아차리게 될지도 몰라요.
당신은 올해 첫 솔내음을 어디에서 만나실 건가요?